옛적 이야기

“731부대, 자식 앞에서 위안부 생체해부”

부비디바비디 2007. 4. 10. 15:26

◀ 731부대 해부실

일본군들이 철수하면서 폭파시킨 해부실 내부의 잔해. 일본군은 증거 인멸을 위해 실험 대상자들을 살해하고 불을 질렀다.



▶ 731부대 전경

불에 탄 731부대의 모습. 세균 전쟁을 위해 생체실험에 희생된 사람 수는 3000여명으로, 한국·중국·러시아인들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1948)


▶ 731부대 생체실험

일본 의사가 생체실험을 하기위해 손을 묶은 채 배를 갈라 내장을 만지고 있다. 마취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실험 대상자의 눈알이 튀어나와 있다.(1936)

2차대전 당시 생체실험으로 악명을 떨친 ‘731부대’가 종군위안부를 자식이 보는 앞에서 해부했다는 증언이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

9일 요미우리신문(인터넷판) 보도에 따르면 당시 육군 731부대의 위생병이었던 오카와 후쿠마츠(大川福松·88)씨는 8일 오사카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 ‘전쟁과 의료의 윤리’에 참석해 “애 엄마인 종군위안부를 해부한 적도 있었다”며 “울고 있는 아이 앞에서 엄마는 죽어갔다. 아이는 동상 실험대에 올랐다”고 증언했다.

“매일 2~3명의 살아있는 사람을 해부했다”는 오카와씨는 “잘못된 역사를 사회에 알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며 증언 배경을 설명했다.

와세다대학에서 세균학을 배운 오카와씨는 1941년에 소집돼 44년 8월 731부대에 배속됐다. 그의 소대는 페스트와 콜레라, 매독 등의 병원체를 인체에 주사해 감염 상태를 조사하거나, 인위적으로 인체를 동상시키는 일을 담당했다.

그는 “처음에는 ‘위험한 곳에 왔구나’라고 생각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감각이 마비됐고, 매일 2~3명을 해부하지 않으면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또 “많을 때는 하루에 5명까지 해부했다”고 증언했다.

<미디어칸 고영득기자>



731부대. 짧은 묘사만으로는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박사의 지휘
아래 한국인과 중국인을 비롯해 여러 민족이 당한 죽음의 고통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와 그의 동료는 생체해부, 동상실험, 전염병 및 외과 시술로 수
천 명을 살해했다. [이들은 생체해부 및 실험 대상인 인간을 마루
타(まるた: 통나무)라고 불렀다.]

이것뿐이랴.
이들은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학하고 가증스러운 행위를 일삼았다.
미국 정부는 이들의 연구를 계속하고자 했다.
전쟁은 세상에서 가
장 잔학한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었고, 전쟁이 끝나고서는 이 부대
에서 확보한 화학 및 생물학 기술에 대한 일본의 진보와 미국의 첨
예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이 두 국가는 정치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더 이상 껄끄러운 관계
가 아니었다.

비록 731 부대의 파렴치한 행태를 묵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일본군이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무엇인가 우위를 차지
할 수 있는 무기를 찾으려 했던 최초의 동인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전쟁은 원래 자원이 빈약한 나라에서 주로 발생한다. 일본의 연간
철강 총생산량보다 단일 공장에서 생산해내는 양이 많은 미국과는
달리, 일본은 이미 전술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처럼 대량파괴와 살상을 위한 장비는 일본의 능력으로는
아직도 요원한 것이었다.. 통조림 따개가 일본군들에게 매우 귀한 전리품이 될 만큼 일본은 아주
단순한 전쟁 도구를 만들 원료마저 바닥 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정을 인식하고 있던 의무부대가 전쟁무기로서 각 군인의 능력을 증폭시킬 수 있
는 생물학적, 화학적 방법을 제안했을 때, 일본은 대량 학살을 위한 자신들만의 무기를 확보한 듯
이 여겼었다.

전쟁 중 '이시이'라는 한 과학자가 미래에 있을 모국의 요구를 예견했다.
이시이는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총장의 딸과 결혼하고, 군 장학금으로 유
럽의 생물학연구소에서 연구했다.
그는 또한 누구도 증명하지 못했던 뇌막염 발발이 동시 다발적이지 않을 때 사용되는 효과적인 수
막(water filter)을 개발함으로써 유명해졌다.

일본이 1931년 중일전쟁의 전리품으로 만주를 얻었을 때, 이시이는 군의과대학 박테리아학 연구소
장 자리에 올라 확고한 지위를 확보했다.
그리고 지속되는 중국과의 전쟁은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의 인간을 실험대상으로 쓸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이른바 중국 계획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작전 기지로 하얼빈이 결정되었다. 1938 년 이미 핑판에 다양한 시설을 건립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나서 이시이는 1932 년 8월 실로 막대한 예산으로 <광동군의 전염병 및 수질정화국>을 세웠
다.
이 부대는 1941년 까지는 731부대라고 불려지지도 않았고, 그 이름이 알려지지도 않았다.
1941 년에는 <광동군의 가축전염병 예방국>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로서 일반적으로 100 부대로 알
려졌다. 약 3,000 명의 일본인 직원이 그의 휘하에 있었다. 그리고 충분한 노동자와 <실험 대상>이
그의 지휘체계 아래 놓이게 됨에 따라 이시이는 살아 있는 신이 되어 자신의 의료학교에서 수백 명
의 의사들을 훈련시켰다.

그러한 의사 가운데 한 명인 겐 유아사는 자신들의 활동에 대해 거리낌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주사 바늘을 살균 소독하지 않고 요추 신경을 마취하려는 의사에게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
다. 그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는 그를 죽이려는 거야>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이내 그 마취 장난을 멈추었다. 수십 명의 중국인이 모두 발가벗겨진 상태로 온몸에 물벼락
을 맞은 채 살인적인 추위의 저녁 밤하늘 아래 밤새도록 방치되었다. 아침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행한 일종의
동상 실험이었다.
그리고 731부대 의사들은 추위에 저항력이 강한 사람들의 <피부를 벗겨내 견본을 만들어 수집했다.>

수천 명의 인간을 희생시킨 겐의 짓거리가 합리화될 수 있을까?

<이 부대에는 외과의사가 충분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안과의사와 소아과 의사들이 그런 시술을 하기
도 했다. 생체실험 대상자들은 자신을 치료해줄 것이라는 생각에 서로 싸웠다. 아니, 731의 과학자들
은 자신의 실험을 위해 수평적 폭력을 교묘하게 유발시켰던 것이다.>

분명히 겐과 그의 동료 의사들은 자신들의 동포에게 그 실험을 행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소총을 다룰 줄 아는 능력으로 선별된 의무병과 일본적십자 간호원들이 일반 시민들의 수족을 절단
하는 만행을 도왔다. 이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에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다. 무감각으로 일관한 것이
었다.
<어떤 의사들은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을 구덩이에 내던지려고 할 때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주사기로
그들의 심장에 공기를 주입했다. 다른 의사
(731부대의 군의관은 전후 정계, 학계, 의료계, 교육계, 재
계 등 각 영역에서 높은 지위를 확보했다.)
들과 나는 그 당시 그들을 목 졸라 죽이려 했다. 마침내 한
나이 든 하사관이 말했다. "존경하는 선생님, 그들에게 마취를 하면 죽을 겁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들을 구덩이에 내던졌다.>

실험 대상자들이 공포에 대해 무감각해지도록 부채질한 것은 731부대의 공포통치가 적지 않은 역할
을 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끊임없는 비애만 있었을 뿐이었다. 개별적인 살해에서 대량 학살
에 이르기까지 731부대는 다양한 실험을 했다. 역사가 자신들을 감싸줄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은 얼마
나 효과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페스트에 감염된 쥐들을 고공 폭탄처럼 방출
했다..
42 가구에서 43 명의 사람이 죽었다. 나머지 생존자들은 각기 흩어져, 필사적으로 이 전염병을 막으려
했다.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은 <내 여동생의 죽음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여겨집니다. 동생은 혼자
서 작은 오두막에 있었지요. 그 애를 돌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동생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동생을 보러 갔지요. 목이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어요. 그리고 눈을 뜬 채 죽어 있었어요.>라고 그
날을 회상했다.

<콜레라, 탄저병, 그리고 여러 병원균이 공급되는 식수와 음식에 넣어져 제공되었어요. 어떤 경우에는
콜레라 균이 묻어 있는 사탕을 한 지방 행사에서 아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답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731 부대의
희생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만행을 인정하는 사죄를 고대하고 있다.
뉘른베르크에서 독일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아시아에서 벌어진 사건"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대부분의 일본 전범들은 불기소 처분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으로 독일의 전쟁비밀을 보전하려는 의도로 페이퍼 클립 작전을 펼쳤듯이,
미국은 점점 확대되어가는 냉전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731부대의 기밀자료를 군의관들과 거래했던 것이다.

미국은 다양한 출처를 제시하며 자신들이 일본의 잔혹행위를 미처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좀더 강도 높은 조사가 신속하게 이루어져 미국의 그러한 변명을 일소해버렸다. 1949년 소련에
서 일본인 과학자들이 전범자의 지위로 하바로프스크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조사 결과가 보고서
로 작성되어 일반에게 널리 배포되었다.

그 보고서의 제목은 <세균 무기를 제조 사용한 죄로 기소된 前 일본군 문관재판> 이었다.
[1950년, 모스크바, 외국어 출판국(Foreign Language Publishing House)]

이 전범자들이 재판에 회부되기 전부터 중국은 37가지의 근거를 제시하며 국제적인 공조를 요청했다.
즉 생물 및 화학무기를 이용한 대량학살뿐만 아니라 "의료시설"에서 행해진 일반인과 전쟁포로의 살해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에 대한 국제적인 조사와 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다.

<로키 마운틴 의학지(Rocky Mountain Medical Journal)>의 1942년 8월호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
를 실었다. "일본인들, 세균전 실험을 위해 중국인을 모르모트(Guinea Pigs)로 이용하다."

1942년 일본이 창데에 투하한 세균폭탄에 대해 미국은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 때의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였다. 몇 주 후 미국은 생물학전 연구
소 건립을 정식으로 인정했다. 이를 허가한 대통령도 루스벨트였다. 다소 의아스러운 것은, 그 후 미국
정부는 일본의 세균폭탄에 대해 더 이상 비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50년 전에는 몰랐었따는 논리는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을 잃은 듯하다. 수십 명의 독일 전범은 사형당하거
나 투옥되었지만, 1960년 이후 투옥되거나 사형이 실행된 일본인 과학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실 미국과의 협정 아래 미국의 전범수사 기록은 전혀 출간되지 않았던 것이다. 731부대의
대다수 박사
처럼 이시이도 시민으로서의 영예를 획득했고, 도쿄대학 학장까지 역임했다.

731 부대의 박사들에게는 완벽한 자유가 주어졌다 그리고 미국은 외국의 과학과 과학자들을 병적으로 끌
어들이기 시작했다. 731 부대가 했던 실험 중 일부는 미국에서 지속되었을 것이다.

일찍이 한국 전쟁 때, 중국과 한국 정부는 미군이 생물학전을 행했다고 주장했었다.
최근 걸프전쟁에서 미군은 자국 병사들에게 미국 스스로 생물전 실험을 폐기하고 연구소에서 모두 박멸되
었다고 여겨왔던 병원균에 대한 예방접종을 실시했다.
그리고 미국은 틈틈이 방사능 플루토늄을 자국민에게 주사했다.

일본처럼 미국도 화학 및 생물학병기 금지협정인 제네바 협정에 늦게 가입했다.
미국이 이 협정에 가입하는 데는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야 했다.

"무서웠어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했지요. 그러나 더욱 섬뜩한 것은 당신들이 했던 짓거리를 망각했
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끔찍한 것이지요." -겐

1. 착혈실험 - 대형 원심분리기에 사람을 집어넣고 고속으로 회전시켜 눈, 귀, 코, 입, 성기, 항문 등으로 피가 나오는 과정을 살펴보는 실험
2. 매독실험 - 여자포로를 대상으로 한 질내에 매독균을 주입해서 진행과정을 살펴보는 실험
3. 대체수혈실험 - 동물의 피와 인간의 피를 교환해보는 실험. 주로 말이나 원숭이의 혈액을 이용했다.
4. 동상실험 - 동상치료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실험대상자를 영하 40도의 혹한의 날씨에 장기간 밖에 묶어두고 얼음물에 들어갔다나오거나 팔다리를
담그게 해서 진행과정 및 상태를 살펴봄. 때에 따라 칼로 자르거나 망치로 두드려보기도 했다. 또 모닥불에 동상 걸린 사람의 팔다리를 넣어 동상 진행
상태에 따라 얼마만큼 고통스러워 하는지도 살펴봤다. 또 간단하게는 영하 24∼27도,초속 5m 강풍 속에서 얇은 옷을 입은 채 들것 위에 반듯이 누워 맨발
인 경우, 젖은 신발을 신은 경우, 젖은 장갑을 낀 경우, 술을 마셨을 경우, 공복인 경우 등 갖가지 상황에 따라 실험에 동원됐다.
5. 보병총 성능실험 - 수명의 사람을 일렬종대로 세워놓고 맨 앞 사람의 가슴에 총을 바짝 대고 방아쇠를 당겨 관통력을 측정했다.
6. 신무기 성능시험 - 밀폐된 방안에 사람을 둥그렇게 둘러 앉혀놓고(묶는 것은 기본, 자세가 흐트러지면 안되니까) 한가운데 수류탄이나 소폭탄을 터뜨려 피
해 정도를 살피기도 했다.
7. 진공실험(압력실험) - 압력실에 사람을 넣고 공기를 서서히 빼면서 사람의 눈알과 내장이 어느 정도의 압력에서 튀어나오는지를 실험했다.
8. 독가스 실험 - 밀폐된 방안에 사람을 넣고 청산가스를 주입해서 죽어가는 과정을 살핌.
9. 내열실험 - 망가진 전차 속에 사람을 가두어놓고 화염방사기를 쏘아 얼마나 견디다 죽나를 살펴봄.
10. 세균실험 - 731부대의 꽃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주력했던 실험입니다.
간단하게는 감염된 사람과 건강한 사람들을 함께 가두어 여러가지 질병이 어떻게 전염되는지를 관찰했다. 더욱이 세균에 감염된 사람을 말뚝에 묶어
놓고 마취제 없이 칼로 가슴을 절개해서 내장 등에 어떤 효과를 미쳤는지 살펴보기도 했다.
또 산 사람들을 말뚝에 묶어놓고 시험생산된 세균무기가 얼마나 효과있는지를 실험했고 항공기로 실제 페스트균을 가진 벼륙을 담은 폭탄을 투하,폭탄이 투
하된 중심부로부터 얼마나 떨어진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지도 실험했다.

위와같은 실험을 하였습니다.

정말 일본은 잔인하면서 짜증나는 일을 많이하죠.

이런 실험으로 우리의 조상님들이

많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무찔러야 합니다.

싸워서 이겨야합니다!

언제나 이렇게 보고만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배하여 똑같이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조상님들을 생각해서 질문 올려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별볼일 없다는 듯 넘어가는 마루타 사건을 기억해 주시는 분이 있어서

기분이 좋네요.

도움이 되는 답변이 였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망 후..

미국이 주도한 전후사업 중에서..미국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두가지가 있었으니..

바로..독일의 미사일 기술 입수와 함께..일본의 생체실험의 결과물이 었습니다.

세계 어디서 사람에게 직접 생체 실험을 그렇게 극악무도하게 했겠습니까?

그래서 미국 국방부는 와해된 731부대원들을 찾아가..

일부라도 생체실험에 관한 데이터 입수에 힘을 기울이게 됩니다.

인류역사에 길이 남게 된 전무후무한 생체실험을 일본이 했고

이 자료는 그간 그 생체실험을 못 했던 강대국에게 넘어가게 된 것이라는.....

731부대, "종전뒤에도 세균전 검토"
[YTN TV 2006-07-22 04:35]
생체실험을 한 옛 일본군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가 2차대전 종전 직후에도 일본에 진주하는 미군 등 연합군에게 세균으로 공격하는 방안을 검토했다고 교도통신이 보도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이시이가 종전 다음날인 1945년 8월16일부터 26일까지의 일을 대학노트에 정리한 메모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731부대가 2차대전 종전 직전 세균공격을 준비했던 일은 사실로 밝혀졌지만 종전뒤에도 공격 가능성을 검토했던 일이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출처: 웹상의 글들 모음